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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023의 게시물 표시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의 안티고네

  (스포일러 주의) 넷플릭스 인기 드라마 <더 글로리>는 학교폭력을 당한 주인공의 복수를 다루는 내용이다. 인기 요소로는 권선징악이라는 흥부놀부 전에서 한 발자국도 발전하지 않은 단면적인 인물 설정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는 부자는 사악하고 가난한 자는 선하다는 계급주의 논리가 들어간다. 여기에 미성년자 폭력에 관대한 국내 사법체계에 대한 불신이 있고, 부자가 망해가는 모습에 기뻐하는 샤덴프로이데 (Schadenfreude) 에 열광하는 방구석 1열의 관객들이 있다. 어찌 보면 미 대선과 맞물려 개봉 취소까지 된 영화 <더 헌트(2020)>의 설정처럼 부자가 가난한 자를 재미로 핍박(사냥) 하는 설정은 일맥상통한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더 헌트>와 같은 정치적 은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자신에게 영구 화상을 입힌 가해자들을 찾아 함무라비 식의 사적 징벌하는 계획과 실천이다. 그 점은 오히려 영화 <킬 빌(2003)>이나 <존 윅(2014)>의 설정과 유사하다.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그리스 소포클레스의 비극인 <안티고네>를 가지고 와 법과 도덕의 대립의 예시를 가져왔다. <안티고네>는 외숙부 크레온이 오빠의 시신의 매립을 법으로 막자 이를 어기고 그의 시체를 매장하고 자살하는 내용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매장의 의미가 영원한 안식을 위한 필수라는 점을 상기하면 자신의 양심을 지키려고 법을 어기는 것을 의미한다. 헤겔은 인륜성이라는 개념을 가져와 도덕과 실정법을 화해시키려고 하지만, 이 드라마에는 어떤 인륜성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심연과 같은 주인공의 르상티망(원한)이 보인다. 아직 시즌 2가 개봉되지 않아 결말을 알 순 없지만, 이 시점에서 섣불리 <더 글로리>의 감상평을 안티고네에 대한 평가를 통해 대신한다. 슬라보예 지젝은 안티고네가 광기의 주체, 괴물의 윤리학을 구현하는 안티 하버마스라고 주장한다. 주인공은 화상을 통해 외상(트라우마)를 가진 괴

<재벌집 막내아들>은 왜 재벌이 되지 못했나?

  (스포일러 주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재벌 회장이 된 원작과 달리 주인공 진도준*은 재벌이 되지 못했다. * 재벌 머슴 역할을 하다 죽은 비서실 윤현기가 환생한 재벌집 막내아들 ​ 재벌 회장의 대관식 직전에 진도준은 트럭(볼트 개수 몇 개고?)이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죽인다. 그리고 바닷속에서 유영 중인 윤현기를 살려냈다. 어떻게? 소싯적 재벌 저격수로 불렸던 장하성*으로 환생시켰다. 그가 대학교수 시절 했던 행동주의 펀드(운용사는 미국 헤지펀드인 라자드)를 생각해 보라. 윤현우가 했던 소액 주주운동, 또는 진도준의 재벌 지배 구조 흔들기와 너무나 유사하지 않은가? * 소득 주도 성장이라는 희대의 실험을 한 문재인 정권 초대 청와대 정책실장, 실패 후 주 중 대사로 영전 ​ ​ 김태희 작가는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대중 드라마를 통해 여과 없이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누렸다. 작품을 내재적으로 접근해 보면 진도준은 처음부터 재벌로 태어나 재벌을 해체해야 하는 충족이유율을 가지고 있다. ​ 즉, 윤현우로 살면서 노동자로서 겪는 마르크스적인 인간 소외*를 겪고 주인공은 지배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는 뛰어난 사명감을 갖게 된 것이다. 다만 작가는 부와 명예를 포기하는 주인공이 설득력이 없었는지 앞서 말한 트럭을 십분 활용해 주인공을 교체시킨다. 따라서 실직자로서 윤현우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무산계급 혁명을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 이를테면 IMF로 구조조정 당한 아버지, 공장 노동자로서 진도준을 죽인 하수인이자, 비서실에서 근무하면서 재벌의 비자금을 운반하다 가차 없이 살해당하는 윤현우 ​ 악의 제국인 순양 그룹은 니체가 말한 르상티망에 따라 묘사된다. 쉽게 말하면 가난한 자의 부자에 대한 도덕적 우월감인데, 이를 위해 타락한 자본주의자가 된다. 또한 윤현우 집안의 고난은 수도승의 모습처럼 장면마다 교차편집 시킨다. ​ 거기에 더해 창업주 진양철과 그의 자녀들은 아버지의 대타자에 억눌려 살다 각종 퇴행의 신경증상을 보이는데, 진영기 회장은 부친 살해를 통해 물

아바타2 리뷰

  #아바타2   #정신분석   #영화리뷰   #라캉 ​ 고래잡이 모비딕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자녀 살해가 메인 테마인 이 3시간 짜리 비극은 전작의 주인공(제이크 설리)이 계속 이방인이자 경계인으로 살아가는데서 기원한다.  ​ 주인공 제이크 설리는 전쟁으로 인한 후천적 장애인으로 이방인이 되었고, 이후 아바타의 삶을 선택하여 다른 유형의 이방인이 되었다. 인간과 나비족 간 혼혈은 손가락 숫자가 다르다는 설정을 한 이유는 그가 인간임을 포기했어도 이방인으로 남게 된다는 극적 장치이다. 미국 이민 2세들이 겪는 애환을 주인공의 자녀들로 투사한다. ​ 나비족은 촉수로 사물들과 교감하는데, 이는 성행위를 연상하게 한다. 인간이 아닌 다른 종, 또는 물건에 대한 사랑은 페티시즘, 수간과 같은 전형적 성도착 증상이다. 나비족의 대타자는 계속해서 같은 종족이 아닌 다른 사물과 교감(성교)을 명령한다. 전통적인 방식의 지루하고 현란한 액션과 전쟁신을 연출하며 폭력과 함께 이것은 새로운 종류의 억압적 탈승화*이다.  *  마르쿠제가 프로이트의 유명한 승화를 패러디해 만든 용어로 초자아가 본능을 해방시키라고 억압적으로 명령하는 것, 이를테면 로마의 빵과 서커스 혹은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 3S 정책과 같은 무의식에 강요된 해방  ​ 고래를 닮은 거대 바다생명체인 툴쿤의 신체를 절단하여 불로불사의 묘약을 추출할 수 있는데, 주인공이 속한 나비족은 툴쿤을 사냥할 수 없는 존재로 설정한다. 이는 자본(툴쿤잡이 우주선)이 없는 노동자의 소외를 묘사하는 것으로 해석하면, 인간은 자본가이며 나비족은 노동자라는 계급주의 사상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다만 나비족의 노동을 무해한 평화주의로 포장하여 무산계급의 도덕적 우월성을 내세운다. 침략자로 묘사된 인간 자본가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반동분자로 낙인 찍는 도구가 바로 툴쿤의 존재 이유다.  ​ 한편, 주인공의 장자는 전투 중 동생을 돕다 숙적인 마일스 쿼리치에게 살해당하고 대타자가 약한 둘째는 살아남는다. 둘째 입장에서는 아버지를 간접적으로